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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라이즈 로어 리볼트) 리뷰: ★★★☆, 이해할 수 없어도 즐거운 축제

원더 2023. 1. 30. 10:12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포스터

<RRR> 줄거리

영국 식민 지배 하의 인도. 영국인 총독과 총독 부부는 외진 곳에 있는 곤도족 마을에서 한 소녀 '말리'를 납치해 자신들의 거처로 데려간다. 곤도 족은 "양 떼"라고 불릴 정도로 온순하고 조용한 종족이었으나, 말리를 여동생처럼 여긴 카마람 빔은 말리를 되찾기 위해 델리로 가 수리공으로 위장해 총독저에 들어갈 기회를 노린다.

한편 철저하게 영국 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경찰인 라마 라주는 총독을 노리는 빔을 잡으면 특수보안대로 승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빔을 찾아나선다.

어느 날, 기차 사고로 인해 한 소년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본 빔과 라주는 힘을 합쳐 소년을 구해내고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상대가 자신의 임무를 가로막는 적이란 것을 모른 채.....

 

이 낯선 세계

 

제가 인도 영화를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정식'으로.

 

인도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해봤자 노래와 춤이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웃긴 움짤로 본 과장된 액션 장면 몇 개 정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3시간짜리 다른 나라의 영화를 본다는 건, 거의 지구본을 돌려서 찍은 곳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아주 두근두근했어요.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그렇게 당도한 첫 인도 영화 <RRR>은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영화적인 문법이나 전개 방식, 액션 구성에 대한 예상 이런 것을 모조리 파괴해 나갑니다.

유치하리만큼 직설적인 메시지 전달이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오버스러운 액션은 기본이고, 크레딧이 영화 앞에 나오질 않나, 중간중간 이야기가 뚝 끊기더니 <RRR>이라는 타이틀 스크린이 나오질 않나. 갑자기 "친구가 된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는 존재감 넘치는 노래 가사가 나오면서 방금 내용 요약+약간의 스포일러를 해주는 것도 당황스럽죠. 

 

하지만 보다 보면 이 영화가 가진 압도적인 인도 농도(?)가 삼투압 과정을 통해 스며듭니다.

 

왜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는데 굳이 두 사람이 다리 위에서 몸에 줄을 묶고 서로 반대편으로 점프하면서 하이파이브를 해야 하지?

- 그것이 인도 영화니까.

상류층 파티에서 갑자기 격렬한 댄스 배틀이 10분 동안 펼쳐지는데?

- 그것이 인도니까.

아니 저게 말이 되냐고?!?!?!!!?!!!!!!!

- 디스!!!! 이즈!!!!! 인디안!!!!!!!!!!!

 

포인트는 이 영화가 이래 봬도(?) 의외로 치밀한 복선과 암시를 차용한다는 것. 

진짜 말도 안 되는 전개와 액션인데 이게 은근히 철저하게 복선을 다 회수하고 이상한 데서 현실적인 밑밥은 깔아놔서 보다 보면 좀 그럴듯한데? 싶습니다.

 

설득력이 있어
*본 이미지는 영화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빔이 맨손으로 철장문을 뜯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진짜 말도 안 되지만 잘 보면 문은 강철이지만 경첩이 붙어있는 부분은 나무예요. 빔이 힘이 세다는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암시되었다 보니 뭔가 '아, 나무 정도면 손으로 뜯을 수 있지...'(?) 하게 되는 겁니다.

 


규모의 미학

인도 영화에서 막연하게 예상했던 '과장된 비주얼'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저버리긴커녕 제가 어렴풋이 생각한 '과장'의 정도는 인도 스케일로 1/10도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넷플릭스 RRR 폭발

 

슬로모션 뽷!!!!! 음악 두둥!!! 화염 이펙트 뽜앟!!! 

 

연출 방식 자체는 너무나 뻔하고 촌스러운데,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좀 비범하기 때문입니다.

비범하다는 건 성질이 무엇이든 그것이 일정 이상의 규모를 뛰어넘었을 때 하는 말이죠.

 

'평범하게 말이 안 됨'은 어이가 없지만,

'비범하게 말이 안됨'은 감탄의 영역입니다.

 

ㅋㅑ 오졌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장면

 

이 영화에 비하면 <300>도 빈약해 보이고, 어벤저스 모든 시리즈를 다 모아 와도 인상적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RRR>은 한 번도 작은 것을 거대하게 보이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지 않습니다.

원래 큰 것을 킹왕짱 크게 보이게 하려고 할 뿐. 

 


감정의 미학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이나 미친 스케일 등으로 인해 뇌가 눈을 따라가지 못해 다소 혼란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거의 내내 재미있습니다.

 

RRR 시타

 

기본적으로 아주 보편적이고 진한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걸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영국의 식민 지배 시절 인도인들이 느끼는 울분과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애타는 마음, 고귀한 구원자에 대한 존경,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찐한 우정. 이 모든 것은 내가 영국인이 아니라면 매우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아주 분명하게 묘사됩니다.

(관객이 '착한 영국인'이라면 제니에 이입하도록 구원의 길도 열어놨고)

 

아주 강렬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다 보니 내가 인도인이 아니더라도 작중의 상황만 보고 충분히 적(영국)에게 분노를 느낄 수 있고, 비극이 예상되는 빔과 라주의 엇갈린 행보에는 콩닥콩닥 마음을 졸이면서 보게 됩니다. 

 

RRR 빔과 라주

 

특히 빔과 라주의 우정도 포인트인데요. 요새 관객들을 낚으려고 하는 브로맨스는 좀 은근하게 다듬어져서 영악한 구석이 있는데 <RRR>은 그냥 정직하게 상남자! 상남자의 우정!!!을 부르짖습니다.

뭔가 이걸 '브로맨스'라는 단어로 칭하는 것도 마치 김치를 KTFF(Korean Traditional Fermented Food)라고 부르는 것 같은 낯간지럽고 어색한 느낌이 드네요...

 

표현적으로는 더없이 투박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매우 진한 이 우정은 배우들의 연기와 케미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합니다.

빔이 영어도 못하고 어리바리해서 좀 헤매거나, 라주가 꼼수를 부려 친구와 여인을 이어주려는 장면 등 뻔한 신도 배우들이 잘 살려서 귀엽게 보이고, 서로에게 처절하게 분노하고 슬퍼하는 연기도 매우 인상적.

 

어떻게 저렇게 둘 다 찐한데 다르게 찐해서(?) 잘 어울리지..... 

 


극단의 미학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의 묘사는 매우 분명합니다. 

영국 놈은 나쁜 놈.

이게 근본적으로 인도 독립운동 투사들을 담은 국뽕 영화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 측과 적(영국)들의 묘사에 들이는 성의는 100배 1000배 차이가 납니다.

 

작중 나오는 백인 배우들의 의상과 연기는 거의 서프라이즈 수준이며, 대사도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홀로 활약하는 레이 스티븐슨과 입이 떡 벌어지는 총독 저택을 제외하면 제작진이 영국 쪽에 들일 제작비와 각본상의 노력을 몽땅 횡령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주인공들을 위한 자본으로 쓰였죠.

 

사실 주인공 둘이 인도의 실제 독립 운동가들을 모티프로 한다는 점을 모르고 본다면, 라주의 정체는 나름 반전이고 그의 숨겨진 심리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섬세하며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러닝 타임이 3시간이 넘지만, 장면 장면이 좀 길어서 그렇지 스토리상으로는 딱히 뺄만한 부분도 없어요.

 

비유하자면 배경 쪽은 떡진 텍스쳐로 대충 밀어버리고, 그 리소스를 주인공 모델링에 쏟아부어 모든 디테일을 하나하나 구현해 놓은 느낌입니다. 배경은 PS2급이고 주인공은 PS5 렌더링.

 

RRR 캡쳐

 

또 작중 테마를 관통하는 강렬한 상징과 중요한 대사는 정말 결정적인 순간마다 반복되어 효과를 높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저 장면,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기 위해 서로 모르던 사이던 두 남자가 굳이 온갖 난리를 피우며 몸을 날려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이 장면이 의미는 이보다 더 명백할 수 없습니다.

람은 '불'이고 빔은 '물'이라는 상징, 서로 손을 맞잡은 두 주인공이 앞으로 협력 관계가 될 것이라는 암시, 람이 빔에게 국기를 건네주고 국기로 몸을 감싸 불길에서 보호하는 것은 인도 독립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상징은 너무 대놓고 드러내면 촌스럽기 때문에 은근하게 감추려고 하는데 <RRR>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냥 한 번에 다 쏟아부어서 강조, 강조, 또 강조해서 시력 마이너스인 사람이 200m 밖에서 봐도 뭘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만듭니다.

(심지어 못 봤을까 봐 노래로도 또 알려줌)

 

이런 단순 명쾌한 부분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굉장히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마디로 뇌빼놓고 보기 좋음

 


종합평: 인도의 축제

넷플릭스 RRR 춤

 

주연 배우들의 화려한 퍼포먼스, 터지는 화약, 엄청난 CG, 신나는 춤과 노래, 찐한 브로맨스, 민족적 고난의 서사, 신격화와 전설, 그리고 동물들까지....

영화는 시청각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만, 이건, 이건... 기존의 '종합'이라는 범주보다 더 큰 종합 예술이라고 할까. <RRR>은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서커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 청. 나. 게.

 

RRR 움짤RRR 움짤2

 

비주얼은 그야말로 미쳤다는 말밖에는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인프피 내향인은 벌써 기빨릴 정도로 모든 화면의 인구 밀도가 높고, 신박한 카메라 연출이나 구도, 심지어 주연 배우들의 짱짱한 육체미까지 시각의 말단부터 자극하는 비주얼의 향연. 

 

RRR 춤 장면
아니 어쩜 저렇게 춤을 찰지게 잘 추지

 

이 영화를 논할 때 이 댄스 장면을 빼놓을 수 없죠. 

 

인도 남자 둘이서 댄스로 영국 상류층 파티장을 휘어잡는 장면은 매우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며(색감부터 동화스럽) 계급과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도 유치하리만큼 노골적이고 뻔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지루함과 진부함을 느낄 여지는 없습니다. 10여 분 내내 나가떨어질 때까지 댄스 배틀을 펼치는 부분은 전투가 아닐 뿐 훌륭한 액션 시퀀스고, 너무 흥겹고 스펙터클합니다. 게다가 두 주인공의 찰진 댄스 퍼포먼스는 정말 멋져서, 이런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이 함께 일어나서 춤추지 않으면 적어도 박자에 맞춰 박수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짝-짝-짝

 

그야말로 비주얼로 정신적인 단점(사상을 나타내는 표현의 세련됨 등)을 씹어먹어 버린 장면.

 

RRR 움짤

 

종합하건대, 다른 허접한 해석 따위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압도적이고 명확한 영화적 구도와 특유의 진한 분위기는 다른 나라에서 온 관객들을 단번에 복속시킵니다... 아, 독립 운동가 영화에서 이 단어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군요.

그럼 달리 말해볼까요.

뭐라고 할까,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훅 끼치는 습도, 피부에 와닿는 인구 밀도, 도처의 진하고 복잡한 향에 약간 어지럽기도 하면서 긴장되고 두근거리는, '어떤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단번에 스며드는 감각'.

 

언어도 통하지 않고,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방에 처음 보는 것들 뿐인데 어쩐지 즐겁습니다. 신기하고 신선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축제, 그것이 인도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RRR>
★☆
이해를 뛰어넘은 향유, 비주얼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