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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리뷰 : ★★★★ 맛깔나고 섬뜩한 음식 영화

원더 2023. 4. 14. 10:40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포스터

 

음식에 대한 영화들은 극단적인 두 부류로 나뉩니다.

추억과 감정이 담긴 따뜻한 음식을 통해서 힐링과 위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카모메 식당>부터 <리틀 포레스트>, <아메리칸 셰프> 등)가 있고, 칼과 불,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혹은 금기)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통해 스릴러와 결합하는 영화(<한니발>이나 <더 메뉴> 등)가 있죠.

 

<헝거>는 요리 장면과 음식이 무섭다는 특징을 보면 확실히 후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요리를 단순히 스릴러적인 장치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헝거>는 음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계급 구조와 성공(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을 파헤칩니다.

친근하고 불쾌하고 부럽고 섬뜩한, 그런 감각에 대한 영화.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의 주인공 오이
태국 영화 잘 만드네......

 

엔딩으로 향하는 주제 의식의 동력이 조금 딸린다는 느낌이 있지만, 낯설고도 멋진 태국 배우들의 연기, 임팩트가 넘치는 다채로운 음식들, 긴장감 넘치는 대립의 연속은 보는 내내 즐겁습니다. (혹은 섬찟합니다)

 

헝거

맛깔나고 섬뜩한 음식 영화 한 그릇

 

 

※ 아래부터는 <헝거>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언급 등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헝거> 줄거리

 

길거리의 낡은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 요리사 '오이'.

여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주방에서 요리하는 오이와 폴

 

어느 날 오이의 요리 솜씨를 눈여겨본 한 손님에게서 유명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헝거'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됩니다. 

헝거의 셰프인 폴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뛰어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팀원들을 몰아붙이며 독재적으로 주방을 지배합니다. 

폴은 오이의 재능과 열망을 인정하고 그녀를 주방에 들이고, 오이는 그의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점차 더 넓은 세계, 더 높은 성공을 향한 허기를 느끼게 되는데...........

 


미식: 끔찍한 아름다움

 

음식을 다루는 작품은 관객에게 그 음식을 직접 먹일 수가 없기 때문에 비주얼로 승부합니다. 목적에 따라 '최대한 맛있게'(<아메리칸 셰프>처럼) '집밥처럼 푸근하게'(<카모메 식당>처럼) 혹은 '매우 찝찝하고 불안하게(<한니발>처럼)' 보이도록 만들죠.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속 음식

 

<헝거>의 요리는 강렬합니다.

오프닝 신부터 맛깔나지만 어딘가 불온한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으며, 조각조각 해체한 가재를 손으로 허겁지겁 집어 먹고 입가가 흙탕물 같은 색깔의 소스로 범벅이 된 남자는 '허기'라는 제목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헝거의 셰프인 폴은 매우 야성적이고 때로는 보기 끔찍할 정도로 강렬한 요리를 합니다. 

헝거의 요리는 막 엄청 맛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추한 모습으로 음식을 쩝쩝대는 부자들을 보면 일부러 멕이나 싶을 정도죠. (실제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멕이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강렬한 불. 

날카로운 칼.

넘쳐나는 피.

 

<헝거>가 요리하는 음식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사람을 재료로 쓰는 것도 아닌데 요리 장면이 <한니발> 못지않아요. (칭찬임;)

 

음식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태국 영화인데 화면이 너무 맛깔스러우면서도 섬뜩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여기에 진짜 사람 몇 명쯤 잡는 듯한 절묘한 브금까지. 

가끔 감성팔이할 땐 너무 의도가 직접적이라서 재미가 반감되는 부분도 있지만(병원 신이라든가), 이야기 진행 내내 쫀득쫀득 아찔한 게 멈출 수 없는 연출이었어요. 

 

 


맛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음식 영화

 

<헝거>는 음식 영화지만,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 영화에서는 맛에 대한 대사나 반응도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손님들이 맛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런 평가가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셰프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얼마나 예약을 하기 어려운지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싼 돈 들여 출장 파인다이닝을 의뢰한 부자 의뢰인들은 사실 맛이 뭔지도 제대로 모릅니다.

오이가 독립해서 성공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한 상품성이 있었고, 톳이 그걸 제대로 개발했기 때문이죠.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폴의 요리
이 순간은 폴이 지향하는 '계급의 전복'(부자들이 나에게 허기를 느끼게 하는)의 상징

 

<헝거>의 본질이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오이와 폴이 출장 요리로 대결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대충 대결이 흘러가는 양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오이는 다소 정석적으로 맛있는 요리를 하지만

2. 폴이 통째로 매단 고기를 칼로 찌르는 미친 퍼포먼스로 시선을 사로잡고,

3. 그 다음엔 오이가 향수를 자극하는 소박한 국수의 냄새와 스토리텔링으로 손님들을 데려오는데,

4. 폴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단순한 콘소메 수프로 한 번에 다시 손님들을 끌어모읍니다.

5. 그러나 폴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손님은 "사실 폴 요리는 원래부터 별로였다"면서 탈룰라를 시전

 

이것은 더 이상 음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혀 음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둘 다 맛은 어느 정도 있었을 테고, 오이는 나름대로 사랑과 추억을 담아 국수를 만들었지만 그녀가 이기고 폴이 패배한 것도 결국 맛이나 요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폴이 매우 정확한 미각을 가지고 있었지만(냄새를 맡고 한 입 먹은 것만으로도 재료를 정확히 맞추는 등) 그가 맛으로 승부를 보지 않았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죠.

 

<헝거>는 음식의 형태를 통해 주제를 요리합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음식은 실제로 맛을 보기 위한 음식이 아니며 제목인 '헝거'의 뜻은 그것을 위한 허기가 아닙니다.

 


'허기': 현대 계급 사회의 저주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폴

네가 먹는 음식은 네 사회적 지위를 뜻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계급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 오이가 일하는 노점 식당 ↔ 헝거
  • 소박한 식사 ↔ 파인다이닝
  • 보조 ↔ 셰프
  • 요리사 ↔ 그들이 하는 요리를 먹는 부자

 

하루하루 살기 바쁜 사람들은 초라한 식당에서 저렴한 국수를 후루룩 마시면서 "살기 위해 먹는다.", "이게 제일 맛있다."라는 말을 하지만, 여유로운 부자들은 출장 요리사를 불러 신기하고 희귀한 음식을 즐깁니다.  

 

오이는 헝거에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고급 세계'를 접하고 자신이 원래 있던 노점 식당과 파인다이닝의 계급 차이를 인식하게 됩니다. 친구가 즐겨 먹는 음식도 돼지사료처럼 보이고, 자신이 만든 비싼 요리보다 소박한 국수를 좋아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서운해하죠. 

오이가 점차 자신을 이런 초라한 식당, 초라한 음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과정, 그리고 폴이 남긴 "네가 느끼는 허기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발언은 당장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비싼 음식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현대판 귀족의 조건입니다.

그러니 다들 그렇게 오마카세 먹으러 다닌다고 인스타에 올려대는 것 아니겠어요.

 

<헝거>에서 음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실 요리 자체엔 별 관심 없고 셰프와 사진을 찍거나 허세를 부리는데 열중하는 부자들의 묘사는 통렬합니다. 아주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오지만 그들이 폴의 요리를 먹는 모습은 좀 역겹죠.

이는 음식에 대한 폴의 삐뚤어진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자, 현대 계급 사회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주인공 오이

 

한편 ''은 성공에 대한 오이의 열망-그녀의 허기를 상징합니다. 오이는 애초에 불을 잘 다루기 때문에 볶음 담당으로 스카우트되었는데 폴은 그녀에게 더, 더, 더 세고 위험하게 불을 다룰 것을 강요합니다. 

불꽃에 휩싸여 활활 타는 웍을 바라보는 오이의 눈빛, 폴이 자극한 자신의 욕망(특별해지고 싶다)을 마주한 그녀는 화상을 입어가면서 요리를 연습하고 결국 한 단계 올라갑니다. 

 

그녀의 레스토랑 이름이 '플레임'인 것은, 폴의 레스토랑 이름인 '헝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영화는 사회 전반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의 성공(계급적 상승)에 대한 열망과 그 결과도 조명합니다.

 

주방 안에서도 계급이 있습니다. 헝거에서는 폴을 제외하면 모두 엑스트라 취급인데 그 안에서도 서로 더 높은 계급을 위해 경쟁하고, 때로는 반목합니다. 오이는 헝거를 나와서 자신의 레스토랑을 차리고 결국 계급 상승을 이루게 되지만....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절정은 아닙니다.  

오이는 "이제 시작이다."란 말을 끊임없이 되뇌며 그녀의 식당을 찾아온 폴은 성공을 대가로 점점 더 많은 것을 잃게 되리라고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합니다. 오이든 폴이든, 결국 투자자와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맞춰줘야 하는 고용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늘 전전긍긍해야 하죠.

 

.....끝나지 않는 계급의 굴레.

 


마무리: 완벽하지는 못한 코스

 

주제도 날카롭고 포장도 신선했으며 전반적으로 영화를 무척 솜씨 있게 조리했지만, 그래도 저는 막판에 대한 아쉬움을 써보겠습니다. 저는 입맛 까다로운 불평불만러니까요!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폴

 

개인적으로 오이는 무척 매력적이고 좋은 주인공이었는데, 폴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폴은 진짜 못돼 처먹은 인간이지만 요리 실력은 확실하고, 음식과 손님에 대한 신념도 분명합니다. 상당히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인데요. 

그의 과거는 좀 노골적이긴 하지만, 과거사를 듣는 순간 폴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의 음식이 유난히 불쾌한 구석이 있는지, 왜 그가 자신의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부자들을 보면서 슬며시 웃었는지, 왜 레스토랑 이름이 '헝거'인지. 

 

반면 오이의 동기는 '특별해지고 싶다'는 대사로 다소 막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래도 그녀가 헝거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자신의 식당까지 내는 데에는 충분하긴 했지만. 

 

넷플릭스 태국 영화 헝거 폴과 오이

 

문제는 폴과 오이가 다른 지점이에요.

오이가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를 아끼는 마음은 폴과 분명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폴은 주변 사람을 하도 괴롭혀서 칼빵까지 맞는 반면 오이는 가게 경영에 어려움을 톤에게 후원자를 연결해 주려 노력하고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뛰어갑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분명하게 (적어도 폴의 과거사만큼) 확실하게 드러난 것 같지는 않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녀가 폴과 같은 길을 선택했으나 도중에 다른 결말로 빠지는 이유, 즉 엔딩에서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계기도 좀 불안합니다. 

가족이 그리워서,라고 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상으로는 가족의 훈훈한 추억이 그리 많이 나오진 않았거든요. 오이가 다소 우습게 여기던 징징이 국수가 감성을 자극하는 히든카드로 부상한 것도 같은 결에서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모든 문화권에서 사기적인 '집밥'의 키워드가 있긴 하지만)

 

폴이 가진 '사랑보다 강력한 동인(허기)'은 분명하게 표현된 반면, 오이가 가진 동인과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또한 금수저에 대한 오이 친구의 직설적인 대사나 엔딩 장면에서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서민들의 모습을 훑는 연출이 소박한 집밥으로 이어지는 연출은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마치 훌륭한 코스 요리를 먹고 나서 입가심으로 마신 수프에서 약간 수돗물 맛이 난 것 같다고요. 

.... 그래도 남김없이 들이키겠지만.

 


 

..... 이 영화를 보면 배가 고파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마카세를 먹고 싶을까, 집밥을 먹고 싶을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