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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오키나와 여행기 #2. 츠보야 야치문 거리

원더 2023. 6. 21. 10:30

 

나하에 도착한 날 가장 먼저 하려고 한 것은... 

그릇 사기.

오키나와에서 유명한 야치문 도자기 그릇과 컵을 사서 밥을 해 먹을 생각.

 


01. 야치문

 

야치문(やちむん)은 '야치(焼, 굽는다)+문(物, 물건)'으로, 오키나와 도자기를 의미.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류큐 왕조 시대 중국과 한국에서 도자기 및 도자기 기술이 들어와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오키나와 나하의 츠보야 야치문 거리에서 파는 야치문 그릇들

 

두껍고 소박한 형태에 활기찬 색깔의 무늬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문양이 특징적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기류를 통칭합니다. 실제로 오키나와의 많은 식당에서 야치문 그릇을 쓰고 있고 또 집집마다 대문이나 지붕 위에 놓아두는 시사도 모두 야치문.

 

싸고 가벼운 여타 여행 기념품과는 달리 묵직한 물건인데, 야치문을 살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나하의 츠보야 야치문 거리와 요미탄에 있는 요미탄 도자기 마을 두 군데.

오늘은 츠보야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을 하기로!

 


02. 츠보야 야치문 거리

 

야치문 거리는 나하의 국제 거리와 이어져 있습니다. 국제 거리의 덴부스 나하(로손 편의점 있는 곳)에서 안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하 시립 츠보야 도자기 박물관이 나오고 여기가 츠보야 거리. 혹은 하얏트 리젠시 나하 호텔에서 걸어서 1분.

 

나하 야치문 츠보야 거리

 

떠들썩한 관광지의 소음이 확 줄어들고, 낮고 붉은 기와 지붕에 창가에는 도자기들이 가득 진열된 상점들이 늘어선 조용한 돌길이 펼쳐집니다. 요란한 간판도 없고 분위기가 정말 호젓해서 힐끗 보면 주택가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

 

츠보야에 도자기 공방이 모이기 시작한 건 17세기 즈음으로 류큐 왕조에서 조선의 장인들을 불러들여 이들이 츠보야 지역에 가마터를 잡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꾸준히 생산되던 야치문 도자기(壺屋焼, 츠보야야키)는 종전 이후 가마의 연기 때문에 가스 가마로 바뀌거나 공방을 옮겼는데 1970년대 도공들이 요미탄으로 이주하여 요미탄 도자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둘을 비교하자면 요미탄은 좀 더 옛 방식으로 만드는 공방과 가마가 있고 츠보야는 갤러리와 카페 위주로 현대적으로 어레인지된 소품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입니다. 가게마다 특징이 달라서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있어요.

 


03. 환상의 메론 플로트, etha

 

일단 츠보야 거리에 오긴 했는데 하도 더워서 어딘가 앉을 곳이 없을까 하고 찾아다니다가 들어간 가게, 이사(Etha).

 

나하 야치문 츠보야 거리의 etha

 

이곳의 야치문은 '류큐가 중국이나 아시아가 아닌 유럽의 영향을 받았다면'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 컨셉입니다. 대체역사물이라고 할까. 주인분은 「망상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야치문의 컨셉 뿐만 아니라 유약이나 기술 등도 여러 가지를 실험한다고. 

 

묵직한 도자기에 짙은 색깔, 유럽풍의 시사 머리 장식이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가격은 다른 가게들에 비해서도 다소 비싼 편이고, 무게도 꽤 나가는 편이었지만.

 

야치문 츠보야 거리의 메론 소다 플로트

 

여기는 작은 카페도 겸하고 있어서 카운터에 앉아 메론 소다 플로트(크림소다, 아이스크림을 올린 음료)를 주문! 

 

메론 소다는 처음이라서 두근두근하면서 기다렸는데 비주얼이 정말 너무 최고였음... 게다가 메론 소다 플로트 자체가 일본의 메론 소다+바닐라 아이스크림 조합이라서 이사의 야치문에 나오는 게 딱 어울렸네요. 

 

밖은 찌는 듯이 더운데 묘한 유럽풍의 카페에 앉아서 시원하고 달달한 메론 소다를 먹으니 천국.

 

게다가 카페 안엔 혼자였고, 붙임성 좋은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오셔서 30분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뜻밖의 실전 일본어 단련

한국인 관광객은 다들 피부가 반들반들 좋다든가 오키나와의 햇빛은 정말로 장난 아니라든가, 젠자이를 먹어본 적이 있냐든가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

조용히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예상 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혼자 여행의 묘미죠. 

기운을 차려서 이제 본격적으로 둘러보러 갑니다.

 

 


04.  여섯 형제의 장남 공방, 이쿠도엔

츠보야 야치문 거리 이쿠도엔

 

이쿠도엔(育陶園)은 츠보야에서 6대째 도자기를 구워온 도예원으로, 정말 '전통'이라는 느낌이 있는 브랜드. 굽기 전의 도기에 밑그림 없이 무늬를 조각하는 선조(線彫) 기법이 특징이라고. 

 

특이하게도 이쿠도엔은 본점 외에 하위 공방을 5개나 두고 있는데 모두 츠보야 거리에 있고 제각각 특징과 대표 작품이 다릅니다.

 

본점은 좀 묵직하고 클래식한 느낌인 반면 하위 공방 중 하나인 guwaguwa는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쓰기 쉽도록 가볍고 얇은 야치문을 모토로 하고 있고, 위에서 메론 소다 플로트를 먹은 etha도 이쿠도엔의 하위 공방.

 

츠보야 야치문 거리 이쿠도엔의 야치문

 

개인적으로 여기 도자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 구경했네요. 야치문 특유의 투박함 속에서 묘하게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엄청 고민한 끝에 흰 당초무늬 컵을 하나 샀습니다. 중간 사이즈. 손잡이 없는 것. 4,200엔.

아이스 커피 마시기 딱 좋음.

아 사진 보니까 이번엔 핫음료용 머그가 사고 싶...

 

컵에는 사방팔방으로 성장하는 당초의 덩굴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손으로 잡으면 선조의 파인 부분에서 파삭파삭한 흙의 질감이 느껴져서 무척 기분이 좋아요. 가볍진 않지만 한 손으로 쥐기에는 딱.

 


05.  내가 마실 잔을 고를 수 있는 카페, 부쿠부쿠

츠보야 야치문 거리 우치나 카페 부쿠부쿠

 

그리고 이어서 야치문 갤러리 겸 카페인 '우치나 카페 부쿠부쿠'.

참고로 여긴 다른 날 간 건데 그냥 이번 포스트에 같이 정리하는 거...

 

상당히 세련된 외관이 눈길을 끄는 가게인데, 가게 안도 깔끔하고 현대적입니다. 그리고 더운 날엔 가게 앞에 있는 젠자이와 커피 사진에 홀린 듯이 들어가게 됨...ㅋㅋㅋㅋㅋ

 

베니이모 파르페

 

여기서 주문한 건 따뜻한 아메리카노 + 베니이모 파르페 세트!

베니이모는 오키나와 산 자색 고구마로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입니다. 오키나와 여기저기에서 군고구마, 아이스크림이나 고로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맛볼 수 있는데, 베니이모 타르트 같은 가공품 외에는 오키나와현 밖으로 반출할 수 없어서 있을 때 잔뜩 먹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아이스크림이 맛있음...

 

그리고 부쿠부쿠의 가장 큰 특징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야치문 중에서 자신이 마실 잔을 직접 고를 수 있습니다☆

 

옆에서 야치문 판매도 하고 있기 때문에 혹하기 딱 좋은 시스템. 야치문은 묵직해서 그런지 커피잔이 진짜 멋져요.

다음에 들르면 다른 잔으로 마셔봐야지..!


06. 곰돌이 접시, yacchi & moon

츠보야 야치문 거리 yacchi & moon

 

그다음 들른 가게는 조금 안쪽에 있는 yacchi & moon. 

상당히 귀여운 이름과 외관으로부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곳의 유명한 상품이 있으니 바로...

 

yacchi & moon의 곰돌이 접시

 

개대박 귀여운 곰돌이 접시..............

 

이곳의 다른 야치문은 좀 캐주얼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라 크게 취향은 아니었는데 이 곰 세 마리 접시가 너무 귀여워서 심쿵해 버림.. 동급 대비 상당히 비싼 편이라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역시 이렇게 꽂히는 건 사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샀습니다. 하하하핳

메인 디쉬 크기인 7인치짜리를 사서 엄청 알차게 잘 써먹고 있음...

 


07. 한낮의 산책

 

츠보야 거리는 느긋하게 걸어도 끝에서 끝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정도에 호객이나 요란한 간판도 없이 조용하고 호젓한 길입니다. 산책하면서 야치문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군데군데 있는 카페에서 쉬어갈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국제 거리 일대는 좀 낡고 후줄근한 느낌이 드는데, 야치문 거리의 카페들은 확 세련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라 햇빛과 더위에 지쳤을 때 들르기 정말 좋습니다. 

 

츠보야 야치문 거리의 상점, 갤러리츠보야 거리의 시사

 

오늘은 목표였던 야치문 그릇과 컵도 샀고, 카페에서 느긋하고 맛있는 휴식까지 했으니 알찬 하루였습니다!

 


+후기)

츠보야 야치문 거리에서 산 그릇과 컵

 

야치문들은 현지에서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곰돌이 접시는 토스트부터 카레라이스까지 온갖 요리를 올리는데 쓰이고 있으며, 컵도 커피에서 젠자이까지 멀티 활용 중. 매일매일 쓰고 닦다 보니 벌써 친해진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쭉 함께하자!